『사랑의 기술』 맛보기


시작하며

사실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은 ‘너 진짜 똑똑하다’라는 유튜브 채널에서 처음 접했는데, 그때는 영상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사랑에 대한 경험이 없어도 너무 없는 나는 결국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 몇 달 전, 대규모로 책을 샀을 때 이 책을 같이 샀다. 아무래도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세상을 이해하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도 나는 사랑이라는 것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 지식을 갖추게 됐어도 나는 사랑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족을 제외한 타인을 사랑한 경험도 없고, 타인으로부터 사랑받아 본 적도 없는 내가 어떻게 사랑에 대해 말할 수 있을지 몰라서 그냥 조용히 있기로 했지만, 얼떨결에 여기에 정리한 내용을 올리기로 약속한 바람에 이렇게 되었다. 이 글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편견

사랑이란 무엇인가?

나는 이 질문에 온전히 답할 수 없다. 가장 큰 장애물은 나 자신의 경험 부족이다. 물론 사랑을 아예 모른다는 것은 아니다. 나도 부모님을 통해 배운 것이 있고, 세상을 통해 보고 듣고 읽는 것이 있다. 하지만 결국 내가 경험하지 않은 모든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내가 들어본 적도 없는 음악가의 음악을 평가하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특히 사랑이라는 개념에서 큰 지분을 가지는, 흔히 ‘연애’라 말하는 것에 대해 유효한 말은 단 한마디도 할 수 없다. 더욱 답이 없는 것은 나 자신이 편견으로 가득한 사람이라 내용이 머리에 쉬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편견을 고치고 새로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분명한 결정으로 드러내는 것이 최우선, 그다음은 그 생각을 남김없이 파괴하는 것, 그다음은 그 잔해를 깨끗이 치우고 새로이 탑을 쌓는 것이다.

잘못된 생각에 대해서는 당연히 비판받아야 할 것이고, 이렇다 할 경험도 없으면서 사랑을 이야기하는 내 생각보다는 경험에 기반한 여러분의 생각이 더 믿을 만할 것이다. 그러나 앞서 적은 것처럼 이것이 생각을 바꾸는 첫걸음이라는 점을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는 사랑을 어떤 경험의 집합으로 보고 있는데[1], 이 경험은 두 사람이 함께하는 것이자 가치를 교환하는 거래를 통해 도출된 결과다. 이를테면 한 쌍의 연인이 함께하는 시간은, 서로의 매력 간의 거래가 성립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립된 거래를 통해 두 사람이 각각의 시간을 지불하고 두 사람만의 특별한 경험을 얻는 것, 지금으로서는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다. 그리고 이 거래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첫째가 외관, 둘째가 이미지다. 일단 사람이 좀 봐줄 만해야 최소한 협상 테이블에 앉아보기라도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다음에 협상에서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유감이지만 사랑에 대한 제대로 된 도식도 경험도 없기 때문에 내가 정의한 사랑은 반쪽도 채 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는 껍데기일 뿐이다. 거래와 협상에 비유한 나의 정의는 어디까지나 사랑의 바깥에 위치한 아웃사이더의 시선으로 바라본 것일 뿐, 그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도대체 나 같은 사람이 존재하기는 하는 건지, 살면서 그런 경험을 해볼 기회가 나에게도 주어질 지에 대해서 나는 아주 회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불평불만을 토로하는 나와 달리 이 책은 ‘사랑은 기술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시작한다[2]. 사랑이야 아예 모르기도 하거니와 알려면 앞으로 멀고도 험한 길을 가야 하니 둘째치더라도, 여기서 말하는 ‘기술’이란 도대체 뭘까? 이 책의 원본을 보지는 못했지만, 원제가 『The Art of Loving』이니, 내일은 여기서 말하는 기술이 ‘Art’라는 전제로 기술이란 무엇인지 확인해 보겠다.

기술

케임브리지 영영사전을 기준으로, ‘Art’에는 다섯 가지 뜻이 있다.

  1. 아름답거나 감정을 나타내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행위.
  2.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상을 만드는 활동.
  3. 그림 혹은 조각상.
  4.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표현하는 통로의 역할을 하는 활동.
  5. 기술skill 혹은 특별한 능력·사랑

그 자체로 반드시 어떤 물리적인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 이후 저자가 지식, 노력, 그리고 배움을 강조한다는 점, 마지막으로 단어 자체가 ‘기술’로 번역한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Art’의 의미는 5번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다[3]. 이 질문에 대해 저자는 두 가지 상반된 관점을 제시한다. 사랑이 기술이라는 관점과, 사랑은 누구나 겪게 되는 즐거운 감정이라는 관점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사랑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관점 중 하나는 사랑에 지식과 능력이 요구된다는 기술의 관점, 그리고 대부분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관점인 감정의 관점이다. 전자는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사랑을 배워야 한다는 입장이며, 후자는 사랑을 행운만 있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즐거운 감정이라고 여긴다. 저자는 이를 통해 현대인들이 사랑은 배울 필요가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인데, 여기에 몇 가지 이유가 있어서 그렇다고 한다[4]. 이어지는 세 편의 글에서는, 저자에 의하면 대부분 현대인이 가지는 사랑에 대한 세 가지 착각에 관해 설명할 예정이다. 풀어쓰다 보면 우리가 다 아는 내용이니 대단히 어려울 건 없지만, 현실과 어긋난 것처럼 보이는 몇몇 부분이 있는 것 같다.

현대인의 착각

첫번째

사랑에 대한 첫번째 착각은, 대부분의 현대인에게 있어서 사랑은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사랑스러워질까에 대한 문제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실상, 우리 문화권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스럽다고 말하는 경우, 그 의미는 본질적으로는 인기와 성적 매력이 뒤섞여 있다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p.14

쉽게 말해 수준이 맞아야 사랑하고, 또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고 자란 우리는 스스로를 하나의 거대한 인격 시장 속의 상품 중 하나로 여기며, 사랑받기 위해서는 인격 시장에서 자신의 상품 가치를 올려야 하고 그러려면 돈이 많거나, 명예가 있거나, 신체적으로 매력이 있거나, 성격이 좋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려면 사랑받을 자격이 필요하다.

일단 스스로 사랑스러워야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랑에 대한 현대인의 생각은, 연애하고 싶으면 자기 관리를 하라는 조언에서 엿볼 수 있는 생각인 듯하다. 다시 말해, 현대 사회의 ‘사랑스러움’이란, 인기와 성적 매력의 복합체며, 아마 이것이 소위 말하는 ‘사랑받을 자격’의 실체일 것이다. 이 자격은 시대와 사회에 따라 변하며, 현대 사회에서 이렇게 까다롭게 변한 ‘사랑받을 자격’을 대하는 태도는 하나의 스펙트럼으로 수렴한다고 생각한다. 한쪽한쪽 끝에는 자기 계발이 있다. 없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돈을 벌고, 외모를 꾸미고, 페르소나를 가꾸고, 운동해 자신의 상품 가치를 높이려 한다. 자기 계발은 공교롭게도 상품 가치의 향상과 일치한다. 반대쪽 끝은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 방향으로 기운 사람들은 스스로가 그 드높고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대해 회의적이며, 대신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를 다른 것으로 채운다.

두번째

사랑에 대한 두번째 착각은, 사랑의 문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이며, 사랑하는 것보다 쉬운 일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20세기에 일어난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20세기가 도래하면서 ‘사랑의 상대’에 대한 거대한 변혁이 일어났다. 그 이전까지 사랑은 결혼 이후에 생기는 것이며 결혼은 사회적 고려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과거 귀족 집안 간 혼인이나 신분 상승을 위한 결혼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다시 말해,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결실이 바로 결혼이다’라는 생각 자체가 20세기에 들어서야 보편적인 것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또 하나의 변화는 현대인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은 거래 중심적 사고방식이다. 대부분의 현대인에게 있어서 마음에 드는 상대는 마치 소유욕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상품과 같고, 상대와 연인 관계를 맺는 것은 자신과 상대방의 가치를 서로 교환하는 거래와 같다.

현대 사회에서 사랑이라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피도 눈물도 없는 자본주의 사회의 거래라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다.

그렇게 사랑은 20세기에 다시 정의되었다. ‘스스로 원하는 연애 상대를 고른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현대인에게 사랑이란 적절한 대상을 선택하는 것, 혹은 사랑받을 수 있도록 스스로를 가꿔 적절한 대상에게 선택받는 것에 불과하다.

세번째

사랑에 대해 많은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또다른 착각은 사랑을 ‘시작하게 되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에 ‘머물러 있는’ 지속적 상태를 구분하지 못하고 ‘사랑이 식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반하는 것과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사람은 두 가지가 같은 것이라고 착각한다. 두 사람의 관계가 오래될수록 친밀감과 기적적인 면은 줄어들기 마련이기 때문에, 소위 말해 콩깍지가 벗겨지기 때문에, 만약 초반에 경험한 강한 끌림을 사랑이라 생각한다면, 사랑만큼 높은 기대로 시작해 반드시 실패하고야 마는 활동은 찾아보기 힘들다. 사랑은 가슴이 시키는 게 아니었다.

해결 방법

저자에 의하면,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초의 조치는 사랑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무너뜨리고 사랑도 ‘기술’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고 싶다면, 프로그래밍을 배우거나 의술을 배우는 것과 동일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기술을 배우기 위해 충족되어야 하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기술을 배우는 데 있어서 기술에 대한 관심은 가장 밑바탕에 있지만 그만큼 잊히기 쉬운 것이다. 저자는 사랑을 뿌리 깊이 갈망하면서도 돈이나 명예와 같은 사랑 이외의 거의 모든 일이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어서 사람들이 사랑의 기술을 배우려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다. 관계를 맺는 기술은 넘쳐나도, 기술을 써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사랑의 기술』은 앞서 말한 세 가지 요소(이론, 실천, 관심)에 따라 전개되며, 앞으로 사랑의 이론과 그 실천을 다루게 된다. 혹시 책을 가지고 있다면, 다음의 문장에 주목해 보는 건 어떨까? 앞으로 펼쳐질 내용에 대한 단서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도 실천에 대해서는 ‘할 말’이 별로 없긴 하지만.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p.19

인간의 정의

저자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먼저 인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간의 본질 중 하나는 자연과의 관계다. 인간은 본능의 세계 - 동물의 세계 - 로부터, 자연으로부터 벗어난 동시에 결코 자연을 버리지 못하는 존재다. 한 번 자연과 분리된 인간은 두 번 다시 자연과 결합할 수 없으며, 다만 이성을 발달시켜 새로운 조화를 향해 나아갈 뿐이다. 인간의 사랑은 본능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저자의 독특한 관점이 돋보인다.

이 대목은 라캉의 상상계-상징계-실재계를 생각나게 한다. 자신과 자신이 아닌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상상계, 엄마와 합일된 이자 관계에서 살아가는 상징계, 법과 규칙의 세계로 들어가는 실재계. 자연으로부터 멀어지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 같기도 하다.

또 하나의 본질은 인간이 불확실성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라는 것. 인간은 확실한 과거에서 죽음 빼고 모든 것이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리스크를 감수하는 존재다. 그리고 인간은 유일하게 자기 자신을 아는 생명이다. 자기 자신이 나머지와 분리되어 있으며, 원치 않았음에도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며, 마찬가지로 원치 않았음에도 이 세상을 떠날 존재라는 것, 자연의 힘 앞에 무력한 존재라는 것도 안다. 저자에 의하면, 인간의 이런 본질은 분리에 대한 근본적인 불안을 야기한다.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세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제대로 반응하지 못할 가능성이 올라간다는 의미다. 이런 이유로 분리는 격렬한 불안의 원천이며, 죄책감과 수치심을 부른다[5].

앞서 말한 인간의 본질로 인해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바로 이 분리 상태를 극복하고자 하는 욕구며 이에 ‘절대적으로’ 실패했을 때, 고독을 절대로 벗어나지 못할 때, 미쳐버린다. 이것은 분리 상태를 극복할 방도가 없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 순간을 의미하는 것 같다. 시간에 따라 뭔가 나아지기보다는 바뀔 수 없는 뭔가가 분리 상태의 극복을 가로막아 일종의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상황을 말하는 것 같다. 물리적인 상황이라면 무인도에 갇히는 상황, 정신적인 상황이라면 자신의 본성이 분리 상태의 극복을 가로막아 분리 상태를 극복하려면 본성을 버려야 하는 상황을 말할 것이다. 종교와 철학의 역사는 앞서 말한 분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역사이며, 그 대답이 몇 가지로 좁혀지는 동시에 때에 따라서는 새로 확장하기도 하는 역사다. 이렇게 해서 방대한 너비와 깊이의 철학과 종교는 에리히 프롬에 의해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멋지게 수렴한다.

분리 불안

분리 불안의 역사

저자에 의하면, 유아 단계에서는 어머니가 있으니까 어머니와 하나라고 느끼고, 인간 전체의 역사에서도 자연과 하나라고 느낀다. 그런데 분리되어 있다는 느낌과 함께 개성이 발달하면서 인간은 점점 더 분리되고, 그와 함께 분리 상태를 극복하고자 하는 욕구도 커진다. 개인으로서도, 집단으로서도 말이다. 이러한 분리 상태를 극복하는 방법 중 저자가 제시하는 전통적인 방법은 온갖 형태의 ‘먹고, 마시고, 떠드는 상태’다. 그리스 신화에서 디오니소스로 대표되는 도취 상태가 바로 그것이다. 디오니소스의 또 다른 이름은 바쿠스. 그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고대 그리스 이전까지 거슬러 간다. 이 방법의 목적은 황홀경을 통해 인간으로 하여금 외부 세계의 존재와 외부 세계와의 거리감을 잠시나마 잊게 만드는 것이다[6]. 도취 상태에 도달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고대에는 도취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집단의식을 치렀고, 이는 종교의 고대 형태기도 하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에는 우리가 이해한 의미로 종교라고 여길 만한 사례가 더 있었다. 올림포스의 신들이 아니라 디오니소스나 바쿠스와 관련된 종교다. 우리는 대부분 디오니소스를 다소 불명예스러운 주신(酒神)이자 만취의 신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주신 숭배로부터 후대 여러 철학자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심오한 신비주의(神秘主義, mysticism)가 발생하고, 그리스도교 신학의 형성에도 한몫을 하게 되는 도정은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그리스 사상의 발전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경로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디오니소스, 바꿔 말하면 바쿠스는 원래 트라키아족의 신이었다. 그리스인은 문명이 훨씬 뒤떨어진 트라키아인을 야만인으로 여겼다. 초기 농민이 모두 그렇듯 트라키아인도 풍요제를 올렸으며 풍작을 촉진하는 신을 섬겼다. 그들이 섬긴 신의 이름이 바로 바쿠스였다. 바쿠스가 인간과 닮았는지 황소와 닮았는지 분명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트라키아인은 맥주 만드는 법을 발견했을 때 술에 취한 상태를 신성하게 여기고 영예를 바쿠스에게 돌렸다. 나중에 그들이 포도나무를 재배하게 되면서 포도주를 마시는 데 익숙해지자 바쿠스를 더욱 숭배했다. 일반적으로 포도와 포도주가 빚어내는 신성한 광기를 연결한 바쿠스의 기능은 중요해지고, 풍요를 촉진하는 바쿠스의 기능은 다소 부차적인 것으로 여겼다.

버트런드 러셀, 『러셀 서양철학사』 중 발췌

과거 그리스도교의 성사(聖事)가 추구하던 종교적 열광,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것도 바로 이 도취 상태에 다다르기 위한 여러 방법의 하나다.

분리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

도취적 합일

그러나 지금 살펴본 예시는 도취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의식이 집단으로 행해지고, 집단 내에서 공인을 받고 올바른 행위로 인정되는 경우고, 이런 의식이 올바른 것이 아니거나 권장되지 않는 비도취적 문화권의 경우는 다른 양상을 띤다. 이런 문화권에서 도취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애용하는 방법은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사랑이 없는 성행위 등이다. 이런 방법들의 공통점이라면, 잠시나마 분리 상태에서 피할 수는 있겠지만, 결국 분리감이 더욱 심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도취 상태에 도달해 분리 상태를 극복하고자 하는 이러한 행위들을 저자는 도취적 합일이라 부르며, 형태와 관계없이 세 가지 특징을 보인다. 강렬하고 난폭하며, 몸과 마음에 동시에 일어나고, 일시적이며 주기적이다.

집단과의 합일

분리 상태를 극복하는 또 다른 방법은 집단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것이다. 고대의 소규모 사회부터 있었던 방법이고, 지금도 애용되는 방법이다. 도취적 합일도 약간은 섞여 있겠지만, 이러한 집단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대표적인 예시는 아마 나치 독일 아닐까 싶다. 라디오 보급, 화려한 연설 기술, 대중을 고취하는 집단의식 등의 방법을 통해 나치 독일이 추구하고자 한 것은 집단 전체를 하나로 만드는 것, 그리고 이를 이용한 전쟁과 영토 확장이다. 저자에 의하면, 현대 사회에서 행해지는 집단과의 합일은 개인의 자아가 사라지고 그 목적이 군중 속에 합일되어 있는 형태다. 이런 사회에서 고독으로부터, 분리 상태로부터 구제되는 방법은 ‘튀지 않는 것’이다. 유별난 사상이나 감정이 없고, 관습이나 옷, 생각 등을 집단의 유형에 맞추면 개인은 분리 상태로부터 구제된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식의 집단과의 합일이 비단 전체주의 사회만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체제를 불문하고, 분리 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움직임에 응답이 있어야 하는데, 별다른 방법이 없다면 제일 좋은 응답이 바로 군중과 내가 하나라는 메시지이기 때문에, 체제와 상관없이 사람들은 사회와 하나가 되고자 한다. FOMO[7]로 대변되는 ‘남과 다른 나’에 대한 공포는 사회의 형태와 관계없이 현대인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의 합일을 이루려는 의지가 얼마나 큰지 알려주는 직접적인 단서다. 그러니까 아무리 ‘개인주의’가 발달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사회로부터 강요받는 것 이상으로 사회와 결합하여 있기를 바라고 있으며, 우리는 대부분 그 욕망을 의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자기 생각과 기호에 따라 살고 있으며 자기 생각으로 현재에 도달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언제나 우리가 아닌 외부의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의견이 일치하는 것이 우연에 불과하다는 환상 속에 살고 있다. ‘다른 사람과의 의견 일치’가 자신의 견해가 얼마나 정당한지 입증하는 데 사용되는 강력한 근거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개성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그 개성이라고 해봐야 읽는 책, 놀러 가는 곳, 하는 일, 옷차림, 취미, 지지하는 정당, … 이런 ‘정해진’ 것들에 불과하며, 그것들마저 은연중에 집단에 외면받지 않는 어떤 범주 안에 들기를 원하는데도 말이다. 자랑하듯 말하는 ‘난 남들과 달라’라는 말에는 사실 그러한 이면이 존재한다. 나 또한 자신을 여과 없이 드러내 보겠다고 쓰레드를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남과 다른 것을 두려워하며 끊임없이 생각을 맞추려고 하는 한 명의 모순적 인간에 불과하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진정한 개성은, 진정으로 남과 다른 것은, 필연적으로 본질적인 고독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본질적인 고독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개인이 스스로 독자성을 죽이는 이러한 사회는 인간이 거래의 대상이 되는 자본주의에서 비롯된다. 현대 사회는 분리 상태에 대한 공포를 이용하여 대집단 속에서 사람들이 원활하게 일할 수 있게 유도한다. 그러니까 각자 다른 사람들의 조화가 아닌, 사회화 과정의 규격 아래에 찍어낸 표준화된 사람이 모두 동일한 명령에 복종하는 동시에 각자 자신의 욕망에 따르고 있다고 확신하게 유도한다. 거래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표준화되며, 거래의 주체가 되기 때문에 상품을 향한 욕망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평등’이라는 개념은 ‘너와 나의 동일함’이다. 같은 일터에서 일하고, 같은 취미를 공유하고, 같은 글을 읽고, 같은 감정과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의 동일함이다.

‘너와 내가 평등하다’고 말할 때, 그 속뜻은 사실 ‘너와 나는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 다른 점이 없다’는 뜻이다. 이런 군중과의 일치는 사회 속에서 규율과 지도하에 진행되기 때문에 발작적이지 않지만, 동시에 정신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분리 불안을 잠재우기에 충분하지 않다. 현대 사회의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 중독, 자살 등은 이럴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예술적 창조

분리 상태를 극복하는 또 다른 방법은 예술적 창조다. 창조를 하는 사람은 창조를 위해 외부의 재료를 사용하게 된다. 그리고 일하는 과정에서 창조자와 피조물은 하나가 되고, 창조자와 세계는 하나가 된다. 하지만 이마저 불안정하기는 매한가지다. 일단 당연히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창조의 주체로 남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하는 모든 업무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뭐니 뭐니 해도 분업과 전문화다. 노동자는 자기 노동력을 사용해 뭔가를 만들지만, 그 결과물은 노동자가 온전히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는 그 자신 주체가 아닌 더 큰 무언가의 일부에 불과하며, 따라서 예술적 창조를 통한 합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사랑

앞서 살펴본 분리 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들은 저자에 의하면 하나같이 불완전하다. 저자가 제시하는 진정한 해답은 다름 아닌 ‘사랑’, 다시 말해 ‘다른 사람과의 융합’인 동시에 ‘실존의 문제에 대한 신중한 해답’이다. 다른 사람과 융합하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욕구이며, 이를 충족하지 못하면 자신을 파괴하거나 타인을 파괴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과의 융합’이 모두 ‘사랑’에 속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제 저자를 통해 ‘성숙하지 못한 사랑’인 ‘공서[8]적 합일’과 저자가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사랑 중에서 우선 공서적 합일을 살펴볼 것이다.

공서적 결합

저자는 임산부를 통해 공서적 결합을 설명한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어머니와 태아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두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공서적 결합은 어머니와 태아의 관계에 빗댈 수 있다. 어머니 안의 태아는 모든 것을 어머니에게 기대고 있다. 영양을 공급받고, 숨을 쉬고, 안전한 곳에 있을 수 있는 것 모두가 어머니 덕분이다. 어머니는 태아를 먹이고 살리지만, 그와 동시에 안에 태아가 있기에 어머니 자신의 생명도 강화된다. 태아에게 어머니는 세상이며 어머니에게 태아는 애착의 대상이자 어머니 스스로를 강하게 만드는 존재다. 어머니와 태아의 관계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아니고, 다만 대등해야 할 두 인간이 그런 형태로 결합하여 있으면 문제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또한 공서적 결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록 관계가 하나여도 그 관계를 구성하는 주체는 둘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을 기억한 상태로 정신적인 공서적 결합에 대해 살펴보자. 공서적 결합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로 한정하자면, 신체적으로 독립된 두 사람이 정신적인 측면에서 어떻게 결합하여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두 개로 설명하지만, 마치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사실은 동일한 애착이다. 공서적 결합의 수동적인 형태는 ‘마조히즘’이다. 다만 우리가 아는 그 마조히즘과는 약간 다른 개념이다[9]. 여기서 말하는 마조히즘은, 조금 더 일상적인 한국어로 바꾸자면 복종이다. 자신이 결합하여 있는 상대에게 자발적으로 굴종하면서 쾌감을 얻는 성적 취향의 일종이다. 두 사람의 공서적 결합에서 수동적인 쪽은 태아, 즉 복종하는 사람이다. 복종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버릴 기세로 상대를 따른다.

복종하는 사람은 결합의 상대 안으로 도피해 스스로를 버리고 상대와 하나가 되어 고립과 분리에서 벗어난다. 이 과정에서 복종하는 사람에게 있어 상대는 신이자 세상이자 자신의 모든 것으로 팽창한다. 이와 대비되는 공서적 결합의 능동적인 형태는 ‘새디즘(가학적 음란증)’, 다른 말로 지배다. 두 사람의 공서적 결합에서 능동적인 쪽은 어머니, 즉 지배하는 사람이다. 지배하는 사람은 분리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인을 자신의 안으로 품어 그 일부로 만든다. 자신을 숭배하는 자를 흡수해 자기 자신을 팽창시킨다. 바로 이런 이유로 지배와 복종의 관계는 하나이며, 마조히즘과 새디즘은 하나의 공서적 결합을 나타내는 두 개의 이름이다. 공서적 결합으로 구성된 두 사람은 서로서로 필요로 한다. 지배하는 사람은 자신을 숭배해 줄 사람이 필요하고, 복종하는 사람은 흡수당할 곳이 필요하다.

공서적 결합이 어느 한쪽만 분명하게 나타난다고 보기에는 어렵다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이를테면 자신이 상처받은 대로 똑같이 남을 대하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

공서적 결합과 달리 진정한 사랑은, 저자에 의하면 서로의 개성을 유지한 상태에서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능동적인 힘이며, 인간이 스스로를 외부 세계와 분리하는 벽을 허물고 타인과 하나가 되게 하는 힘이며, 그러면서도 각자의 개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누가 그 벽을 허물어줄 것이라 기대해서도 안 되고, 그렇지도 않으니 능동적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사랑은 활동, 즉 ‘에너지를 소비하여 기존의 상황을 변화시키는 행위’인 듯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저자는 또 다른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10].

구체적으로 이런 것이라 생각한다: 앞서 기존의 상황을 바꾸는 능동적인 행위를 활동이라 했는데, 겉으로는 활동적인 사람들[11]이 사실은 그러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따라 어쩌면 ‘수동적인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꾸준히 운동을 즐기는 사람은 사실 사랑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불안하여 자신의 상품 가치를 높이기 위해 그러는 것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과 자주 어울리는 사람은 사실 혼자 있지 못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평소 성격이 밝고 대화를 좋아하는 것은 어쩌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페르소나일 수도 있고, 열정적으로 일하고 자기 계발하는 사람이 사실은 사회가 정한 암묵적인 노선을 따라가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면 그런 사람들을 ‘능동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스스로 뭔가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이것마저 사회가 유도한 것이고, 주변 환경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다.

반면, 평소 몸을 자주 쓰지 않고 명상을 즐기는 사람은 겉보기에는 수동적으로 보이지만, 저자에 의하면 정신을 집중하는 명상은 최고의 활동이자, 내면적 자유와 독립의 상태에서만 가능한 영혼의 활동이다. 이는 활동의 또 한 가지 속성이 타고난 힘을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에 의하면, 이를 잘 나타내는 것은 스피노자의 ‘행동’과 ‘격정’이다. ‘격정’은 수동적 감정이다. 외부의 어떤 방아쇠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고, 인간은 스스로는 알지 못하는 이 방아쇠에 자극받아 쫓기며 감정의 노예가 된다. 반면 ‘행동’은 능동적인 감정이며, 사람은 ‘행동’할 때 자유롭고 자기감정의 주인이 된다. 저자에 의하면, 사랑은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다. 자유가 없고 감정에 휘둘리는 것을 어찌 진정으로 사랑이라 부르겠는가? 그래서 사랑은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능동적인 활동이다. ‘사랑에 빠진다’라는 말은 틀린 말이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

현대인 대부분이 착각하며 살듯이,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사랑에 빠진다’라는 말은 틀린 말이다. 나도 그렇게 막연하게 생각해 왔던 것이고, 때로는 개개인의 생각이 합쳐져서 사회적 현상을 부르기 마련이니 반성해야 할 일이다. 빠졌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닌 다른 무언가다. 사랑은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저자에 의하면 이 ‘주는 것’에 대하여 가장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오해는, ‘주는 것’이란 누군가 받아야 하는 것이며, 내가 가지고 있던 무언가를 포기하고, 희생하고, 빼앗기는 것이다. 거래의 관점에서 ‘주는 것’을 본다면 그게 맞다. 거래라는 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줘서 그 대가로 다른 것을 얻는 것이니 말이다. 거래의 관점에서 준 것에 대한 대가가 없다면 그것은 ‘사기당한 것’이다. 받지 못해도 주겠다니, 그것참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이다.

저자는 사랑은 ‘거래’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지만, 그 말에 대해 아무리 그래도 현실적으로 사랑이 거래가 아니기 어렵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들은 저자에 의하면, 받아들이거나, 착취하거나, 저장하는 단계를 넘어서지 못한 ‘비생산적 성격’이다. 사랑을 주고자 해도 받을 대상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감수하지 못한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을 감수하는 일은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 윤리적인 측면에서 참 어려운 일일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비생산적 성격의 또 다른 유형은 희생이라는 의미에서 주는 것을 덕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생산적인 성격처럼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는 것을 통해 희생을 감수한 데에서 오는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주는 것은 덕이어도 어디까지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반면 생산적인 성격은 주는 것을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다. 그냥 주는 거다.

생산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은 주는 것을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다. 왜 줄 수 있는 걸까? 내어줄 것이 있기 때문이다. 줄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산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주는 것’을 ‘잠재적 능력의 최고 표현’으로 여긴다. 그들에게는 ‘주는 것’이란 박탈당하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활동성을 느낄 수 있는 즐거운 일이다. 흔히 사랑을 쉽사리 이루지 못하는 이들에게 여유를 가지라 조언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하는 말 같기도 하다. 다만 경험 없이 순수 이성으로 ‘여유’를 이해하기란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서, 최소한 나에게 있어서는 ‘이치를 터득하라‘ 만큼 추상적인 조언으로 들린다. ’주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도대체 무엇을 주라는 것일까? 다행히 사랑이 ‘주는 것’이라는 주장은 책 속의 다양한 사례를 통해 확인되는데, 저자는 성적인 사례, 물질적인 사례, 그리고 인간적인 사례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주는 것'은 무엇일까?

성적인 예시

‘주는 것’에 대한 첫 번째 예시는 성에 관한 이야기다. 모든 생물학적 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손을 남기는 기능이다. 남성과 여성 모두 성기능의 핵심이 주는 것이고, 특히 남성의 경우는 더 직관적으로 이해가 된다. 여성 또한 성적으로 ‘준다’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준다는 것에 있다. 성별과 상관없이, 주지 못하는 사람은,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불감증이다.

물질적인 예시

물질적인 차원에서 ‘주는 것’은 그 자체로 일정 수준 이상의 능력과 부를 의미한다. 후원, 기부, 이런 것들은 줄 수 있는 것이 없으면 당연히 불가능하다. 거리에서 버스킹을 하는 사람에게 돈을 주는 것도 일단 줄 수 있는 동전이나 지폐 그 자체가 있어야 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조금 오묘한 이야기가 나온다. 물질적인 차원에서 많이 줄 수 있는 사람은 부자다. 그러나 그것이 곧 많이 가지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많이 가지고 있어야 많이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싶지만, 사실 둘 사이에 뭔가 미묘한 의미의 차이가 있다. 과연 사람은 어디까지 줄 수 있을까? 아마 대부분의 경우 그 한계는 본인의 생존이 위협당하지 않는 선까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선은 어디일까? 라는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겠는데, 여기에는 절대적인 정답이 없고 사람마다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다. 여행에 비유하면 이해가 되지 않을까 싶다. 여기 나폴리에 온 두 사람이 있다고 치자. 누군가는 배낭 하나만 메고 그냥 나폴리 시내를 자유로이 활보 하기만 해도 마냥 좋다고 생각할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러다 무슨 일이 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무조건 가이드를 동반한 패키지여행이 최고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람마다 이 정도까지는 괜찮다고 생각하는 그 선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궁전에 살지 못해 안달 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궁전 밖에서 노숙하면 되는 사람도 있다.

인간적인 예시

세 번째 예시이자, 이 책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겨지고 또 강조하는 것은 ‘인간적인 차원’에서 주는 것이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준다는 것은 무엇일까? 저자에 의하면, 그것은 자신을 주는 것이다. 자신의 기억, 몸짓, 표정, 지식, 이해, 이런 것들을 주는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은 한 사람의 안에서 살아있기 때문에, 인간적인 차원에서 사랑은 자신의 생명, 자신이 가진 생동적인 것을 상대도 느낄 수 있게끔 주는 것이다. 사랑을 하게 되면 두 사람만의 시간이 쌓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아마 그런 것을 저자가 ‘생명’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 아닐지 싶다. 주는 것의 목적은 상대를 향한다. 어떤 실리를 얻기 위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상대의 생명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싶어서 주는 것이다. 그렇게 주면 뭔가가 돌아오는데, 그것은 상대의 반응, 상대 안의 생동적인 것이다. 그것이 과연 진짜로 받아들여질지는 또 다른 문제지만.

능력이다...

앞서 세 가지 예시를 통해 밝힌 것처럼 사랑은 ‘주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사랑은 능동적이고, 끌어내는 능력이며,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무능력이다. 그러고 보니 『미움받을 용기 2』에도 비슷한 대목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정말 그렇다. 사랑을 떠나서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것은 일단 최소한 어느 한쪽이 다가가려는 행위를 실행해야 한다. 어떤 반응이 돌아오는가와 상관없이 말이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다. 이에 대해 내가 경험을 통해 말할 수 있는 것은 다가가려는 행위가 수용 받지 못하는 상황이 머릿속에 기억되는 강렬함의 정도에 따라 난이도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것이 이성이 아닌 감정의 문제라는 것은, 다가가는 것이 조금의 확률이라도 있다는 이성적인 판단에도 불구하고 그 판단을 실행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밝혀진다. 이는 곧 행동경제학에서 이야기하는 손실회피 심리다[12].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자기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은 주는 자의 성격과 관련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힘에 의존하는 용기를 가지고 있다. 저자에 의하면, 한 사람이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그 사람이 이런 성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와 연결된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보호, 책임, 존경, 지식으로 나타난다. 사랑하는 사람은 지식을 통해 어떻게 해야 상대를 보호하고, 상대를 책임질 수 있을지에 대한 답을 내리게 되고, 상대를 향한 지속적인 관심이 없다면 지식은 공허하다. 지식을 통해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야 ‘있는 그대로의 상대’와 하나가 되는 진정한 합일,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여러 번 생각하게 되는 대목이다.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상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홀로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네 가지 요소

사랑의 네 가지 요소는 다음과 같다.

  1. 보호 :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에서 잘 나타나는 요소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대상을 보호한다.
  2. 책임 : 사랑하는 사람은 그가 사랑하는 대상의 생명과 성장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인다. 책임은 그 자체로 보호와 관심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기에 책임은 의무가 아닌 자발적 결심이다.
  3. 존경 :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존경이 없다면, 사랑은 사랑이 남지 못하고 집착이나 억압으로 변질될 것이다. 존경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상대의 특별함을 아는 능력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그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상대가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란다. 바로 그 점으로 인해,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이 홀로 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명백해 진다. 그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아야, 상대를 내가 원하는 대로 바꾸려 들지 않는 것이다.
  4. 지식 : 우리에게는 분리 상태를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와 더불어 모르는 것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탐구의 욕구가 있다. 그래서 사랑은 탐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데, 모르는 상대를 알기 위한 첫 번째 전략은 그 상대를 지배하는 것이다. 상대로 하여금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내가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느끼게 만들어서 상대를 나의 사물로 바꾸는 전략이다. 또 다른 전략은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이란 적극적으로 상대방에게 깊숙이 침투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상대에 대해, 또 나에 대해 알고자 하는 욕망이 충족된다.

여기까지가 사랑의 네 가지 요소인데, 저자는 사랑을 일컬어 ‘궁극적 앎을 향한 유일한 길’이라 말한다. 도대체 궁극적 앎이란 무엇이고, 왜 사랑이 그 유일한 길인 것인지…지금까지도 나는 알 것 같다가도 모르겠다.

왜 저자는 사랑이 궁극적 앎을 향한 길이라 말하는 걸까? 저자에 의하면, 알고자 하는 욕망은 우리가 아는 통상적인 지식으로는 채울 수 없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이 세상의 모든 글을 암기하고 있어도 인간에 대해 알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에 대한 지식은 다른 사람과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알 수 있게 하고, 그제야 사랑을 통해 인간의 궁극적 본질을 알 수 있다. 8월에 봤던 영화 <오펜하이머>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원자 폭탄이 끝없는 연쇄 반응으로 세상을 멸망시킬 확률은 아무리 이론적인 계산을 반복해도 0에 근접할 뿐이다. 이론이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 그 너머는 실험의 영역이다. 사랑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이론으로 알지 못하는, 오직 실천 속으로 뛰어들어야 알 수 있는 영역이 있다. 아마 그것이 사랑이라는 개념의 핵심일 것이다. 그렇다면 본질이 그런 이상, 나는 나의 언어에 진정으로 사랑을 담지 못할 것이다.

하나가 된다는 것

하나가 되고자 하는 욕구는 보편적이고 실존적이다. 여기서 출발해 남성과 여성이라는 양극의 존재들이 하나가 되고자 하는 더욱 특수하고 생물학적인 욕구가 생긴다고 저자는 말한다. 남성과 여성으로 분리된 우리의 성적인 양극성은 인간이 다른 성과 하나가 되는 것을 추구하게 하고, 이 양극성은 각각 남성과 여성 안에도 존재한다. 이 개념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알고 보니 칼 융의 아니마와 아니무스다.아니마와 아니무스는 각각 여성성, 남성성으로 번역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융에 의하면, 성을 불문하고 우리의 몸에 남성 호르몬과 여성 호르몬이 모두 흐르는 것과 같이, 우리의 마음에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공존한다. 그런데 남성은 남성성이 의식에 있고 여성성이 무의식에 있지만, 여성은 여성성이 의식에 있고, 남성성이 무의식에 있다. 우리의 무의식에 반대쪽 성이 있어서 그게 이따금 튀어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무의식에 자리 잡은 반대쪽 성은 미성숙한 형태로 이따금 튀어나오게 되는데, 남성의 경우에는 그것이 다혈질이나 짜증이 되기도 하고, 여성의 경우에는 그것이 고집이나 완고함이 되기도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모든 인간은 성장을 위해 내부에 존재하는 남성과 여성 모두를 성숙하게 키워야 하는 과제가 주어진다는 것이 아니마와 아니무스에 대한 이야기다. 한 개인의 내부에 존재하는 남성과 여성이 하나가 될 때, 그는 내면의 합일을 경험하게 된다. 이후로 챕터가 끝날 때까지 저자는 프로이트에 대해 꽤 길게 비판한다.

프로이트 이론에 대한 나의 비판은 그가 성을 과대평가했다는 것이 아니라 성을 충분히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에 있다. 자신의 철학적 전제에 따라 그는 이러한 정열을 생리학적으로 설명했다. 정신분석은 앞으로 프로이트의 통찰을 생리학적 차원에서 생물학적·실존적 차원으로 옮겨놓아 프로이트의 개념을 수정하고 깊게 할 필요가 있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p.62

사랑의 유형

지금까지 이야기한 사랑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사람한테 이렇게 사랑하고, 저 사람한테 저렇게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비록 저자는 사랑을 형제애, 모성애, 성애, 자기애, 신에 대한 사랑으로 분류하나, 어디까지나 대상의 유형에 따라 사랑의 모습이 달라진다는 것이지, 하나의 성격은 하나의 사랑을 한다. 사랑은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성격을 따라간다. 여기서 생길 수 있는 오해 중 하나는 사랑이라는 단어의 사용 범위일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사랑은 일상생활에서 ‘우정’과 ‘신앙’에 해당하는 영역까지 확장된다. 일상생활에서 대다수가 생각하는 사랑은 여기서 모성애와 성애에 해당한다. 자기애는 요즘 들어 ‘나르시시즘’이라는 단어로 더 자주 통용된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형제애부터 신에 대한 사랑까지, 책에서 제시한 모든 종류의 사랑을 검토한다.

형제애

형제애는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이며. 여기에는 앞서 살펴본 보호, 책임, 존경, 지식 등 사랑의 요소가 전부 포함되어 있다. 성서의 ‘이웃 사랑’과 같은 사랑이다. 어쩌면 인류애라는 단어가 더 와 닿을 수도 있겠다. 형제애는 인간의 동질성, 즉 이 세상 모든 인간이 동일한 핵심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에서 생기며, 저자는 다른 사람을 깊게 바라보면 우리의 동일성을 지각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 사랑의 특성은 배타성이 없다는 것으로, 연인이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향한 형제애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형제애는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향한다.

목적없이 사랑하라

어려워지는 것은 그다음 부분이다. 저자는 무력한 자, 가난한 자, 이방인을 향한 사랑이 형제애의 시작이라 말한다. 무력한 자는 자신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주인을 사랑하지만, 그건 동물도 하는 것이고, 생존을 위한 본능이다. 저자에 의하면, 사랑은 어떤 목적에도 이바지하지 않을 때만 펼쳐진다. 사랑이 어떤 목적에 이바지하게 되면, 목적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게 되고, 그건 사랑이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고 했던 기존의 입장과 대립한다. 그건 이미 사랑이 아닌 다른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인해, 사랑의 능력을 키운 자는, 정말로 사랑의 능력을 키웠다면 자신과 동등한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을 표면적으로 바라보며 차이점으로 구분하지 않고, 핵심에 침투해 인간의 동등함을 알아보는 사랑이다.

너를 사랑하는 것은 곧 나를 사랑하는 것

무력함, 가난함, 이질성alienation의 공통점은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먹이사슬의 최정점에 있어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하고, 돈이 아무리 많아도 돈이 통하지 않는 상대 앞에서는 가난하며, 영국에 있을 때는 주변 사람들과 동질성을 느끼는 영국 사람이 뉴욕에서는 합법적 외계인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무력한 자, 가난한 자, 이방인을 사랑하는 것은 도움이 필요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모성애

수동적인 사랑

다음으로 소개하는 사랑은 모성애다. 흔히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읽히기도 하는 모성애는 인간의 인격이 발달하는 과정과 연관되어 있다. 태초에 인간은 어머니와 하나다. 그러다 태아가 세상 바깥으로 나왔을 때, 아직 너무나도 미성숙한 두뇌는 분리 불안이 주는 어마어마한 정신적 충격으로부터 태아를 보호하는 완충제 역할을 한다. 덕분에 태아는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자극과 그 자극을 제공하는 주체를 구분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태아에게 있어 어머니의 품에 안겨 느끼는 따뜻함은 어머니와 구분되지 않는다. 어머니는 곧 따뜻함이고, 음식이고, 안전함이고, 만족이다.

그러다 태아는 성장해 유아가 되면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자극과 주체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느꼈던 따뜻함과 어머니가 분리되어 아이에게 인식된다. 이와 동시에, 서로 다른 사물들에 명칭을 부여하고 다룰 줄 알게 되고 사람들을 다루는 방법을 배운다. 어린아이에게 가장 가까운 타인은 어머니다. 아이는 자기 행동에 따른 어머니의 반응을 통해 어떻게 해야 사랑받을 수 있는지를 배운다. 내가 웃으면 어머니도 따라 웃을 것이고, 내가 음식을 잘 먹으면 어머니는 또한 웃을 것이다. 내가 울면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안아줄 것이며, 내가 대소변을 잘 가리거나 편식하지 않으면 어머니가 칭찬해 주리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저자에 의하면, 이러한 순간의 경험들이 모여 ‘나는 사랑받고 있다’는 경험이 된다.

이 경험은 얻기 위해 해야 할 일이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 수동적이다. 어머니의 자식이기 때문에,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아름답고 칭찬할 만하기에, 어머니가 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나이기에 사랑받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받기 위해서는 어머니의 자식으로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획득하거나 보상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 없이 사랑을 누릴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모성애는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상대의 보호, 존중, 책임, 지식을 가만히 있기만 해도 얻을 수 있다니! 그러나 이렇게 무조건적인 모성애는 바로 그 무조건으로 인해 부정적인 측면을 가진다.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없다는 것은, 나의 노력과 어머니의 사랑이 무관하기 때문에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어머니의 사랑을 통제할 수 없다. 그 사랑이 여기 있으면 너무나도 행복한데, 여기 없으면 인생이 끝난 것만 같은데, 그 사랑을 만들어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

이번에는 어머니의 입장에서 모성애를 살펴본다. 모성애는 아이의 생명을 무조건 긍정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긍정이 존재한다. 하나는 아이의 생명이 유지될 수 있도록 보호하고 책임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아이가 자신의 삶을 사랑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아이가 자신의 삶을 사랑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은, 산다는 것이 좋은 일이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좋은 일이라고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또한 아이가 스스로를 창조자로 느낄 수 있도록 해주고 어머니와 완전히 분리된 인간이 될 수 있도록 성장을 돌봐주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진정한 모성애는 자신이 돌봐줘야 하는 연약한 아이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성장하는 아이에 대한 사랑이다.

모성애의 이타성과 헌신은 바로 이 지점에서 진정으로 빛나며, 이것이야말로 모성애가 최고의 사랑, 거룩한 사랑으로 불리는 이유다. 모성애는 모든 것을 주면서도 사랑하는 자의 행복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능력을 요구하는 어려운 과업이다. 이 과업을 달성하지 못하는 여자는 어린아이가 연약할 때만 ‘사랑하는 어머니’로서 성공할 수 있으며, 아이가 자신으로부터 분리하고자 하면 사랑하지 못한다. 저자에 의하면, 그들은 자아도취적이며, 지배욕과 소유욕이 있다.

성애

모성애가 하나였던 어머니와 아이가 분리되는 사랑인 것과 반대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남녀 간의 ‘사랑’인 성애는 본래 둘이었던 남자와 여자가 하나로 결합하고자 하는 갈망, 곧 완전한 융합에 대한 갈망이다. 앞서 소개한 사랑과 비교했을 때, 형제애가 동등한 자들 사이의 사랑이고 모성애가 무력한 자에 대한 사랑이라면, 성애는 다른 한 사람, 오직 그 사람과 결합하고자 하는 갈망이다.

기만

특기할 만한 부분이 있다면 저자가 성애에 하여 ‘현존하는 사랑의 형태 중 가장 기만적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남겼다는 점이다. 저자는 성애가 흔히 ‘사랑에 빠진다’는 폭발적인 경험과 혼동된다고 말한다. 낯선 두 사람 사이의 장벽이 갑자기 무너지고 친밀하게 아는 사이가 되는 그 경험은 본질적으로 오래가지 못한다. ‘사랑에 빠지게’ 되면, 사랑받는 사람을 잘 안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관계가 주는 모든 형태의 친밀감은 시간이 지나면서 희박해진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자기 자신과 타인을 탐구하고 철저히 규명하는 것인데, 이는 곧 분리 상태의 일시적 극복이다. 이때 상대방의 분리를 신체적 분리로 경험하기 때문에 신체적 결합이 분리 상태의 극복을 의미하게 되고, 이 밖에도 자신의 유치한 면을 보이고, 사생활과 감정을 말하는 것, 공통 관심사를 확립하는 것 등이 분리를 극복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모든 친밀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희박해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시 다른 사람과의 사랑을 추구하게 된다. 새롭게 만난 사람은 다시금 친밀한 사람으로 변하고, 그 경험은 그 이전보다 덜 강렬한 것이 되고, 마침내 우리의 마음속에 ‘새로운 사랑’에 대한 신화를 만들어낸다. 성적 욕망의 기만적 성격은 이러한 신화에 많은 도움을 준다. 성적 욕망은, 저자에 의하면, 융합을 지향하지만, 육체적인 욕망이나 긴장의 해소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자극하는 것은 사랑만이 아니다.

성적 욕망의 방아쇠

성적 욕망은 공서적 결합에 의해, 허영심에 의해, 파괴하려는 소망에 의해 자극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성적 욕망은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사랑이라는 관념과 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사랑은 강렬한 정서의 한 종류이며, 육체적으로 서로를 원할 때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잘못된 결론에 도달할 가능성이 크다. 성적 결합의 소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성적 욕망은 순간적으로 합일의 환상을 일으키지만, 그와 동시에 합일의 환상이 끝나고 나면, 이전과 마찬가지로 낯선 사람처럼 상대와 멀리 떨어져 있게 한다.

독점욕

성애에는 다른 사랑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독점욕이 있다. 이러한 성애의 배타적 성격은 소유적 애착으로 오해되는데, 소유적 애착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두 사람 사이의 이기주의다. 서로 사랑한다는 두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전혀 사랑을 느끼지 않는다면, 저자의 의견에 의하면 사랑 보다는 소유적 애착에 가깝다. 그들은 서로를 동일시하고, 단일한 개인을 둘로 확대함으로써 고독의 극복을 경험하지만, 여전히 그들 이외와 분리되어 있으며, 여전히 서로 분리되어 있고, 그들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성애는 그런 것이 아니라. 상대를 통해 모든 살아 있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다. 오직 한 사람과만 충분하고 강렬한 융합을 할 수 있고 그와 동시에 전 인류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제 저자는 ‘두 사람 사이의 매력’과 ‘순전한 의지’ 사이에 성애가 위치함을 주장한다.

따라서 이 두 가지 견해, 곧 성애는 특수한 두 사람 사이의 독특하고 완전히 개인적인 매력이라는 견해와 성애는 의지의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또 다른 견해는 모두 옳다. 혹은 더욱 적절하게 말하면, 진실은 전자에도 후자에도 없다. 그러므로 사랑은 우리가 성공하지 못하는 한 쉽게 해소될 수 있는 관계라는 사상도, 또한 어떠한 환경 밑에서도 이 관계는 해소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상도 마찬가지로 잘못이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p.88~89

그렇다면 이제 성애를 ‘특수한 한 사람에게 자신을 내어주겠다는 결단’이라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애

자기애는 나르시시즘이라는 말로 인식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최소한 프롬은 이와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자기애를 둘러싼 의견은 다양하다. 종교 개혁가로 잘 알려진 장 칼뱅은 자기애를 ‘페스트’라 일컬었으며, 프로이트 또한 그와 의견을 같이한다. 그에게 있어 자기애는 자아도취[13]와 다를 것이 없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자기애는 사랑과 상호 배타적인 개념이며, 자기 자신을 사랑할수록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어렵고, 그 반대 또한 성립한다. 이처럼 나 자신을 사랑할수록 남을 사랑하지 못하며, 자기애는 이기심과 같다는 견해는 서양 사상에서는 매우 전통적인 견해다[14].

장 칼뱅은 자기애를 '페스트'라고 말한다[15]. 프로이트는 정신의학적 용어로 자기애를 말하고 있으나 그럼에도 그의 가치 판단은 칼뱅의 가치 판단과 다르지 않다. 프로이트는 자기애를 자아도취, 곧 리비도를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자아도취는 인간의 발달에서 매우 초기 단계이고, 후에 이 자아도취적 단계로 다시 돌아오는 사람은 사랑할 줄 모르게 된다. 극단적인 경우에 이 사람은 미치게 된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p.89

이러한 관점의 영향으로 자기애는 자기애성 성격장애의 또 다른 이름이 된 듯하다. 또한 스스로를 낮추는 것이 겸손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의 미덕으로 자리 잡게 된 것 같다.

반박

이제 이러한 주장을 에리히 프롬이 어떻게 받아치는지 살펴보자. 그는 기존의 견해에 대한 의문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 과연 심리학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 사이에 근본적인 모순이 있다는 명제를 뒷받침하는가?
  2.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이기심과 같은 현상인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3. 과연 현대인의 이기심은 정말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인가?
  4. 이기심은 자기애의 결여로 생기는가?

1번 의문에 대해 프롬은 다음과 같은 논리로 돌파한다:

나의 이웃을 인간으로서 사랑하는 것이 덕이다.
나 역시 인간이다.
그렇다면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므로 악덕이 아니라 미덕이어야 한다.

따라서 다른 사람과 우리 자신에 대한 태도는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결합적’인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렇기에 2번과 4번 의문 또한 해결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이기심과 반대된다. 인간이라는 개념에 남은 들어가는데 내가 들어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나 자신의 자아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내 사랑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만약 다른 사람만 사랑한다고 한다면, 그건 전혀 사랑할 줄 모르는 것이다.

이기심

그렇다면 다른 사람에 대한 순수한 관심을 분명히 배척하고 있는 이기심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기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이 전부다. 외부 세계는 오직 자기 자신에 대한 유용성을 기준으로 판단된다. 그는 오직 받는 데서만 기쁨을 느끼고 주는 데서는 그렇지 못하기에 사랑할 줄 모른다. 이것이 2번 의문에 대한 프롬의 답이다. 그는 사랑을 ‘생산성의 표현’으로 정의했는데, 이기적인 인간은 생산성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그는 필연적으로 불행하며, 이를 해결하고자 하자만, 스스로 이것을 가로막고 있다. 지나칠 정도로 스스로를 돌보고 있는 것 같지만, 오히려 그것에 철저하게 실패했기 때문에 이를 은폐하고 보상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일 뿐이며, 결국 이 노력은 실패로 끝난다. 프로이트는 이것이 자아도취라 말했지만, 프롬은 이기적인 인간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만큼 자기 자신 또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쉬운 이해를 위해 프롬은 ‘비이기심’이라는 신경증 증상을 설명한다.

비이기심

표면적으로, 비이기심은 이기심과 정반대로 보인다. 저자에 의하면, 비이기심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다른 사람만을 위해서 살며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을 자랑하는 마음’이다. 물론 당사자는 스스로가 자신의 희생을 자랑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할 것이고, 그래서 비이기적인 사람들은 왜 자신은 이렇게나 헌신적인데 불행한지, 왜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조차 원활하지 못한지 몰라 당황스러워한다.

저자에 의하면, 비이기주의는 다른 신경증 증상들과 연결되어 있다. 오히려 비이기주의가 환자의 가장 중요한 신경증 증세다. 이 증상은 억압, 피로, 노동에서의 무능력, 애정 관계에서 실패를 겪고 이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관찰되는 증상인데, 정신적인 문제는 정작 이런 증상이 아닌 비이기주의에서 더욱 드러난다. 비이기주의의 표면 뒤에는 삶에 대한 적의에서 오는 매우 강렬한 자기 본위[16]가 숨어 있다. 이러한 비이기주의의 본질은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에서 드러난다. 비이기적인 인간은 겉보기에는 도덕적으로 흠잡을 곳이 없다 보니 비판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 위치가 격상되어 주위 사람들은 그를 실망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압박을 받게 되는데, 이것이 주위 사람들을 불안과 긴장에 떨게 만드는 것이다. 도덕적 우월감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착한아이 증후군과는 또 다른 개념이다.

결론

결론적으로 자기애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결합하여 있기 때문에 곧 타인에 대한 사랑이며, 나에 대한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이다. 그래서 만약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면, 자녀들은 부모를 통해 기쁨, 행복, 사랑이 무엇인지 배우게 될 것이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가장 가까운 타인을 보며 아이들은 사랑을 배울 것이다.

신에 대한 사랑

마지막으로 저자는 신에 대한 사랑을 소개한다. 저자에 의하면 신에 대한 사랑은 사랑의 종교적 형태이며 심리학적으로 다른 사랑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신에 대한 사랑 또한 분리 상태를 극복하고 합일을 이루고자 하는 욕구에서 생긴 것이다. 종교의 형태와 관계없이 신은 최고의 가치, 최고선을 상징한다. 신은 그 실존 여부를 떠나 그 신도에게 있어 최상위의 가치이며 신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도를 분석하는 작업에서 출발한다. 어찌 되었든 신은 신도 안에 있으니 말이다.

신도는 왜 신을 모시게 되었는가?

신인동형론

인간은 태초의 결합 - 자연과의 본래의 합일 - 으로부터 내던져지면서 발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간은 아직 이러한 원초적 결합에 집착하기에 원초적 결합으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집착하여 합일을 발견하려고 한다. 원시 종교는 이러한 심리를 반영하여 토테미즘이 주를 이루었다. 태초의 동물 숭배 신앙은 직공와 예술가라는 직업이 생기면서 피조물에 대한 신앙으로 변화하였다.한 발 더 나아가 인간은 신에게 인간의 형태를 부여하게 되었다. 이때의 신은 절대적인 권능을 지녔지만, 하는 짓(?)은 인간과 다를 것이 없다. 질투도 하고, 사랑도 하고, 화도 낸다[17]. 신을 의인화하는 이러한 사상을 신인동형론이라 부르며, 이 신 개념은 두 가지 방향으로 발달한다. 하나는 신의 ‘성’이며, 다른 하나는 신의 본성과 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의 본성을 결정하는 정도다.

부성애

신의 '성(性)'이라 함은, 최소한 신도가 느끼기에 신이 신도에게 행하는 사랑의 종류이며 여기에는 모성애와 부성애가 있다. 앞서 어머니의 사랑에 대해서는 모성애 섹션에서 이미 다루었지만,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서는 다룬 적이 없다. 모성애를 소개하면서 살펴본 인간의 발달 단계에서, 이제 우리는 어린아이가 어떻게 어머니의 사랑에서 아버지의 사랑으로 넘어가는지 알아야 한다. 어린아이에게 있어 어머니는 고향이고 자연이다. 내가 태어난 곳이며, 언제든 나를 품어줄 사람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머니와 사뭇 다르다.어머니로부터 아이가 태어난다는 점만으로도 어린아이에게 있어 어머니의 중요성은 아버지의 중요성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대신 아버지는 규칙을 상징한다. 사상, 인공적 사물, 법과 질서, 훈련, 여행과 모험 등의 세계를 대표한다. 아버지는 어린아이를 가르치고, 어른이 되어 부딪히게 될 세계로 들어서는 길을 알려주는 사람이다.

조건부 사랑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과 달리 조건부다. 아버지는 자식이 자신의 기대를 충족해 주었기 때문에 사랑한다. 의무를 다하기에, 자신을 닮았기에 자식을 사랑한다.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아버지의 사랑은 얻을 수 없다. 대신, 노력해서 기대를 충족시키면 아버지의 사랑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아버지의 사랑은 통제할 수 있다. 갓난아이에게는 모든 의미에서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보호가 필요하지만, 어느 정도 아이가 성장하고 나면, 아버지의 사랑이 필요한 시간이 온다. 아이에게 어머니의 사랑 대신 아버지의 사랑이 필요해지는 이 시점은 아이가 소년과 소녀가 되어 사회로 뛰어드는 시점이다. 어릴 적에 살았던 자신과 어머니 중심의 세계에서 떨어져 나와 수많은 타인이 사는 세계로 들어가게 될 때,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위해, 또 주어진 시련을 자신의 힘으로 헤쳐 나가는 어른이 되기 위해 우리는 이끌어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

신 개념의 변천사

인간의 정신적 발달 과정은 결국 어머니 중심의 애착에서 아버지 중심의 애착을 거쳐 둘을 궁극적으로 종합하여 내면에서 발현하기까지의 과정이라 요약할 수 있겠다. 프롬에 의하면, 신의 개념 또한 이러한 변천사를 거친다.

어머니 중심의 종교

신은 본래 '평등’을 상징했다. 이를테면 우리가 모두 대지의 아들이고 딸이기 때문에 대지의 신이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가 모두 평등하다는 식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평등에 바탕을 둔 신의 모성애는 복종에 대한 보상에 가까운 신의 부성애로 바뀌는데, 이는 기독교나 이슬람교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경전이 있고, 신의 말씀이 있는데 이걸 따르지 않으면 신은 보상을 주지 않는다.

아버지 중심의 종교

이보다 더 발전한 새로운 단계는 신을 아버지처럼 생각하는 단계다. 신은 본래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 모두를 공평하게 사랑하고, 무슨 일이 일어나도 여전히 자신을 받아들일 것이고, 사랑할 것이라는 믿음이 종교의 본질이었다. 그 이후 신은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변화해 왔다. 신은 자기 말을 어긴 자에게 벌을 내리고, 신도들이 자신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한다.

신에게는 이름이 없다

이다음 단계는 신을 어떤 존재로 보지 않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신은 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아니다. 어머니와 같은 존재도 아니다. 결국 남게 되는 것은 신의 이름으로 표현되는 가치다. 위기에서 구해주고, 말씀에 따르면 만족하고, 거스르면 벌을 주고, 찬양하면 기뻐하는 존재는 이제 신이 아니다. 신은 그저 "스스로 있는 자"일 뿐, 누가 이름을 붙여줘서 신인 것이 아니고 언어로 완전히 표현될 수 있는 어떤 대상도 아니다. 결국 신이라는 존재가 애초에 만들어진 관념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 단계에 도달한 신도는 오히려 어떤 일을 위해 신을 향해 기도하지 않고, 신을 부모처럼 여기지도 않는다. 대신 그는 지금껏 자신이 어떤 존재를 갈망해 왔고, 그 존재를 '신'으로 여겼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런 존재들로부터 자신은 독립되어 있으며, 대신 '신’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일련의 가치들에 자발적으로 순종한다. 이것이 칸트가 말했던 '최고선’일 것이다. '신을 앞문으로 쫓아내곤 뒷문으로 불러들였다’는 칸트에 대한 평가는 여기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그는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일련의 가치들에 복종하며 그것을 삶으로 나타낸다. 그에게 종교란 언어로 다 나타낼 수 없는 삶의 양식 그 자체다. 내가 나의 어머니, 아버지가 되고, 나의 신이 된다. 말 그대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다. 대신 말로 표현할 수 없으니, 행동으로, 삶으로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성숙한 사람’은 자신이 자신의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는 사람이다. 스스로를 어머니처럼 품어줄 수 있고, 어떤 때는 아버지처럼 스스로를 자율 앞에 무릎 꿇릴 수 있는 사람이다.

바로 그 점으로 인해 저자는 이성과 논리에 대한 지나친 강조를 경계한다. 그는 오히려 신과 인간에 대한 한 사람의 사랑을 밝히는 데 있어 성숙한 '사고’가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밝힌다. 오히려 사고의 바깥에 위치한 것들, 이를테면 그 사고방식을 만들어낸 사회구조나 주변 환경을 살펴봐야 사랑에 대한 인식을 밝혀낼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론 끝!

여기까지가 사랑의 이론에 대한 내용이다. 드디어 나는 사랑에 대한 이론, 그 종착지에 도달했다. 멀리 돌아온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이제 맨 앞에서 언급한 '절차’를 밟을 준비가 되었다. 그다음은 에리히 프롬이 그가 살았던 20세기 중반의 서양 문화에 지금까지의 내용을 적용한 결과다. 그리고 그는 "그래서 이 기술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해 알려줄 수 없다는 대답으로 일관한다. 비록 그 자신이 정신과 의사지만, 어떤 명시적인 처방만으로 문제가 해결되리라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이 성숙하고 생산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의 능력이라면, 어떤 특정한 문화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사랑의 능력은 이 문화가 평범한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에 달려 있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p.123

자본주의

기본 구조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두 가지 원리가 있다.

  1. 정치적 자유의 원리 : 모든 사람의 권리와 자유는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보호되며, 정치적 권력 작용은 법의 지배에 의해 제한된다.
  2. 시장의 원리 : 모든 경제적·사회적 관계는 시장의 조건 하에서 진행되는 자유롭고도 공정한 거래다.

자본주의에서 거래되는 모든 것은 시장에 의해 교환 조건이 결정된다. 유용한 모든 것은 상품화되고, 수요가 없으면 교환 가치를 갖지 못한다. 자본가는 노동력을 사서 일하도록 명령할 수 있고, 노동자는 굶어죽지 않으려면 현재의 시장 조건에 따라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팔아야 한다. 자본은 노동력을 지배한다.

현대인의 성격 구조에 미치는 영향

승자독식

자본주의의 발달은 대다수의 자본이 소수의 거대 기업의 소유가 되는 승자독식의 시대를 불려왔다. 주주들이 기업을 소유하고, 관리층이 기업을 관리한다. 노동자들도 노동조합을 이루며 강력한 관료적 기구를 만들어냈다. 주도권이 개인에서 조직으로 옮겨지면서 거대 조직의 관리자들에 대한 의존도는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템플릿을 원한다

이때 개인은 개성을 잃고 소모적인 기계의 톱니바퀴가 된다. 근대 자본주의에 필요한 사람들은 원활하게 집단적으로 협력하는 사람들, 그 취미가 표준화되고 쉽게 영향받고 예측 가능한 사람을 필요로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사람들이 권위나 어떤 사상에 종속되는 일 없이 자유롭다고 느끼고, 즐거이 그들에게 기대되는 일을 수행하기를 원한다.

그 결과로 인해 현대인은 자기 자신, 동료,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소외된다. 계약에 의해 노동자는 돈을 받고 노동력을 이용해 생산물을 만들지만, 노동자 본인의 욕망이 실현된 것도 아니고, 그 결과물이 노동자의 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노동자는 소외되며, 이것이 바로 생산물로부터의 소외이다. 노동을 통해 인간이 목적을 달성하고 주체성을 실현하
는 것이 아니라 생존하기에 급급하게 된다. 우리는 타인과 함께 있으려고 하지만, 그럼에도 아주 고독하며, 깊은 불확실성과 불안, 죄책감의 지배를 받는다.

완화제

이러한 고독을 사람들이 의식하고 깨닫는 일은 자본주의 시스템에 좋은 일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문화는 이러한 고독을 의식하고 깨닫지 않게끔 도와주는 여러 가지 완화제를 제공한다.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

물질적인 토대, 즉 자본주의가 시대의 정신을 만들어냈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자연적 요구와 일치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인간은 본성상 경쟁적이고 상호 간 적의로 가득 차 있음을 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본주의 정신은 어떠한 욕망이든 충족을 지연하지 말라는 사상을 주류로 만들었다.

상호 간의 성적 만족으로 대표되는 사랑, 그리고 '팀워크'로서 고독으로부터의 피난처로 기능하는 사랑 모두 사랑의 붕괴, 사회적으로 유형화된 사랑의 병리학의 두 가지 표준적인 형태다.

신경증적인 사랑

기본 조건

'애인' 가운데 한 사람 또는 두 사람이 모두 어버이 상에 애착을 느끼고 있고, 어른이면서도 일찍이 아버지나 어머니에 대해 품고 있던 감정을 상대에게 전이하는 것은 신경증적 사랑의 기본 조건이다. 그들은 유아적 관계 유형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했고, 어른이 되어서도 그런 애정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감정적 미숙성은 심각한 경우 사회적 기능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덜 심각한 경우는 친밀한 개인적 인간관계에 국한된다.

어머니에 대한 애착

어머니에 대한 유아적 애착을 벗어나지 못한 남자들은 모성애를 원한다. 애인이 어머니와 같은 사랑을 베풀어주기를 원한다. 이들은 매우 정답고 매력적이나, 여자에 대한 관계는 표면적이고 무책임하다. 만약 여자가 그들의 환상에 따라 살지 않게 되면 그들에게는 갈등과 분노가 생기며, 사랑이 없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그들 자신을 위대한 애인으로 상상하고 상대의 망은에 대해 몹시 불평한다.

아버지에 대한 애착

아버지의 사랑은 조건부다. 아들의 행동에 만족할 때는 언제나 아들을 칭찬하고 선물을 주지만, 아들에게 불만을 느낄 때는 언제나 뒤로 물러서거나 꾸짖는다. 아머니와의 애착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경우, 아버지의 애정에 집착하게 된다. 아버지를 기쁘게 할 때면 행복과 안정감을 느끼고 만족하나 잘못을 저지르거나 실패해서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을 때는 버림받는다.

이렇듯 아버지에 대한 유아적 애착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어른이 되어서도 애착을 느끼는 사람에게서 아버지 상을 찾아내려 한다. 칭찬 여부에 따라 전 생애가 갈리기에 그들은 사회적 경력에서 대부분 성공적이며, 양심적이고 믿을 만하고 성실하다. 그러나 여자 관계에서는 초연하고 멀리 떨어져 있다. 보통 그들은 여자에 대한 가벼운 경멸감을 가지고 있어 점점 더 실망하게 된다.

부모의 소원한 관계

부모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말다툼을 억제하거나 불만을 드러내지 않을 때는 더욱 복잡하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 또한 소원해진다. '예의 바른' 분위기 속에서 밀접한 관계는 가지기 어렵고, 자식은 부모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 결과 그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관게에서 항상 겉돈다.

세상에 굳게 뿌리박고 있지 못하다는 감정은 애인을 야단치고 소리지르게 만드고, 정상적으로 분별력 있게 행동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게 만든다.

우상

자아를 인식하는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우상화하기 쉽다. 상대를 숭배하고,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대체로 그들의 기대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결국은 실망하고 새로운 우상을 찾는다.

화면 속 사랑

사랑이 현실에 없고 화면 속에만 있는 경우도 있다. 현실에서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욕망은 사랑 이야기, 사랑 노래 등을 소비하는 데서 만족을 찾는 경향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다른 사람과 사랑을 주고 받지는 못하지만, 다른 사람의 사랑을 구경할 때 만큼은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 사랑이 현실이 되면, 그들은 다시 얼어붙는다.

이들의시간에 의해 사랑이 추상화되기도 하는데, 지금 이 순간 서로에게 싫증을 느끼면서도 많은 커플들이 미래에 있을 사랑의 축복을 꿈꾸며 현실적 고통, 고독, 분리감을 완화한다.

투사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은 자기 자신의 문제를 회피하고, 그 대신 '사랑하는 사람'의 결함이나 결점에 관여하려고 투사적 메커니즘을 이용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사소한 결점까지도 낱낱이 비판하고 자기 자신의 결점을 천연덕스럽게 무시해버린다. 이들이 만나면 사랑의 관계는 상호 투사의 관계로 변한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문제를 무시하기 때문에 발달에 도움이 되는 조치를 하지 못하다.

자식에게 투사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남이 대신 해결해줄 수 없는 문제를 다른 사람으로 해결하려 하기에 실패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보통 갈등이 없는 것이 사랑이라 믿는데, 사실 사람들이 말하는 '갈등'은 진짜 갈등을 회피하려는 노력이다. 그들의 내면에서 경험되는 갈등은 파괴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더 많은 지식과 힘으로 이어진다.

두 사람이 서로 그들의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사귈 때, 그러므로 그들이 각기 자신의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경험할 때 비로소 사랑은 가능하다. 오직 이러한 '핵심적 경험'에만 인간의 진실이 있고 오직 여기에만 생기가 있고 오직 여기에만 사랑의 기반이 있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p.147

결국...

결국 이다음은 나 자신의 몫이다. 내 생각을 분명한 결정으로 드러내는 것도, 그 생각을 남김없이 파괴하는 것도, 그 잔해를 깔끔히 치우고 나의 세상을 새로이 만들어가는 것도,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사랑의 기술』 안에는 그 내용이 없고 대신 방향만을 제시할 뿐이다. 비유를 해보자면, 이제껏 지도를 따라 길을 걸어와 절벽 앞에 서있는데, '절벽에서 뛰어내려 하늘을 날아라.’는 지침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길은 알려주지 않는 상황이다. 이대로 날개도 없이 떨어지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어딘가에서 재료를 구해다 날개도 만들고, 그 날개로 나는 법도 깨우쳐야 할 것이다. 물론, 누군가 하나부터 열까지 알려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이제야 깨닫게 되는 것은, 내가 성인식을 앞두고 있다는 것. 비록 약관의 나이는 한참 전에 지났지만, 이제야 어른이 될 준비를 마친 것만 같다.

이제 공허한 사고 안을 채울 때다. 경험이 없는 사고가 현실을 제대로 설명해줄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1. 책에서는 모성애, 부성애, 우정까지 포함하는 매우 폭넓은 개념으로 다뤄진다. 다만 이 글에서는 연인 간의 사랑으로 한정해서 다루고 있다. ↩︎

  2. 많고 많은 질문 중에 ‘사랑은 기술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하는 이유는, 에리히 프롬 본인이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과 연결된 것 같다. ↩︎

  3. 즉 저자가 맨 처음 던지는 의문을 나는 ‘사랑은 외국어를 읽고 쓰는 것과 같이 지식과 노력이 필요한 기술, 혹은 특별한 능력인가?’ 정도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

  4. 미리 짧게 말하자면 각각 능동과 수동 간의 착각, 능력과 대상 간의 착각, 그리고 경험과 경험 간의 착각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

  5. 저자는 분리 불안에 대해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예시로 드는데, 교회의 모자이크나 벽화가 라틴어를 모르는 일반 대중이 성경의 메시지를 쉽게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했던 것처럼, 종교를 믿지 않는 나에게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는 사실 여부를 떠나 직관적인 이해를 위한 어떠한 상징으로 다가온다. ↩︎

  6. 바쿠스 숭배 의식은 야생 동물을 갈기갈기 찢고 전부 날로 먹는 야만적인 요소가 있었고, 신분이 높은 여자들과 하녀들이 훤히 보이는 언덕에서 무리를 지어 황홀경에 이르려고 밤새껏 춤을 추기도 했다. ↩︎

  7. Fear Of Missing Out ↩︎

  8. 共棲, 동물의 공생 관계를 뜻함. ↩︎

  9. 광범위한 영역에서 사용되는 전문용어가 일반 대중에게 있어서 그 대표적인 의미가 전문가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수렴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오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

  10. 과연 그 활동의 동기는 무엇인가? 과연 그 활동에 집단무의식의 압박이 없었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는가? ↩︎

  11. ‘활동적인 사람’을 상상할 때면 꾸준히 운동을 즐기는 사람이나 다른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는 사람, 평소 성격이 밝고 대화를 좋아하는 그런 사람, 열정적으로 일하고 자기계발하는 사람이 떠오른다. ↩︎

  12. Loss Aversion. 이 경우 개인이 천칭에 올려놓게 되는 것은 선택에 따른 결과와 그 감정이다. | https://l.threads.net/?u=https%3A%2F%2Fm.sedaily.com%2FNewsViewAmp%2F268MSKJ4K0&e=AT3nIyTUTAEZ09AORfULEQlHhrng-1ZrxOIRggKoM4zzKJ_f1SDV23Lxpr6VY67dKUccm1sotjxaFdtWAHTZhL-Iux1TbWfidVXQIQ-xPPLUcNkHyFGY9B-DzfLv-poekch9yoVfa2syd8gRQeauOKR8YaY_ ↩︎

  13. 나의 욕구와 관련되어 있는 한에서만 외부의 사물을 인식하는 것. ↩︎

  14. 자기애Narcissism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나르키소스에서 유래된 단어다. ↩︎

  15.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

  16. 다른 사람들을 욕구 충족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성향. ↩︎

  17. 하지만 그 시대가 대략 고대 그리스 쯤 됐을 테니, 그것이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